▶ 우리가 모르는 달의 뒷면 (두 번째 이야기)

 

3. 달의 뒷면 탐사하다

1950년대 후반까지 달의 뒷면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달의 칭동이 주기적으로 달 뒷면 중 일부를 보여주었지만 관측 가능한 부분은 달 표면 전체 중 약 59%까지가 한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가끔 보이는 부분조차 작은 시야각에서만 보였기 때문에 유용한 관측을 하기는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뒷면 중 남은 82% 면적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고 그 속성들은 추측에 크게 의존했었습니다.

 

동쪽의 바다는 칭동으로 볼 수 있는 달 뒷면 지형 중 하나입니다. 이 지형은 지름이 거의 1,000Km에 이르는 거대한 충돌 분지이나, 1906년 율리우스 프란츠가 Der Mond에 명칭을 발표하기 전까지 어떤 이름도 붙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에 보정된 사진들을 구체에 투사하여 이 분지의 실체를 밝혀냈습니다. 1967년 루나 오비터 4호가 동쪽의 바다를 정교한 품질로 촬영했다고 합니다.

 

우주 탐사가 시작되기 전에 천문학자들은 달의 뒷면이 지구에서 보이는 앞면과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1959년 10월 7일 소련 탐사선 루나 3호가 달 뒷면의 사진들을 최초로 찍었습니다. 사진들 중 18장이 분석 가능했으며 촬영 범위는 달 뒤 면적 중 3분의 1이었습니다. 이 사진들을 분석한 뒤 1960년 11월 6일 소련 과학 아카데미는 달 뒷면 지도책을 최초로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는 구별된 지형물 500곳이 수록되었습니다. 

 

1년 후 소련은 루나 3호가 보낸 사진들을 기반으로,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지형물들을 포함한 월구의를 최초로 내놓았습니다. 1965년 7월 20일 소련이 쏜 다른 탐사선 존드 3호는 달 뒷면을 찍은 고품질 사진 25장을 전송했는데 이는 종전 루나 3호가 촬영한 사진들보다 해상도가 훨씬 좋았다고 합니다. 특히 이 사진들에는 수백 킬로미터 거리에 걸쳐 늘어선 충돌구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지구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바다 평원 같은 지형은 없었다고 합니다. 1967년 모스크바에서 존드 3호가 보낸 자료에 기초하여 <달 뒷면 도감> 2부가 출판되었습니다. 같은 해 소련에서 <달 전체 지도>와 개정판 월구의가 출시되었다고 합니다.

 

소련 우주 탐사선이 달 뒷면의 주요 지형 다수를 발견했기 때문에 소련 과학자들이 이 지형들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작명들이 일부 논란을 일으켜서, 이후 국제 천문 연맹은 달 뒷면 지형에 이름을 붙이는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다만 소련 시절 붙인 이름 다수는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존치했다고 합니다.

 

1962년 4월 26일 NASA의 레인저 4호 우주 탐사선은 달 뒷면에 충돌한 최초의 우주선으로 기록되었으며 충돌 전 과학적 자료를 전송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1966년부터 ~ 1967년까지 미국 NASA가 발사한 무인 루나 오비터 프로그램은 최초로 달 뒷면 지형을 본격적으로 종합적이고 자세하게 지도를 만드는 연구를 수행했다. 프로그램 최후의 탐사선 루나 오비터 5호가 뒷면 지형 대부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달 뒷면을 맨눈으로 최초로 본 인류는 1968년 아폴로 8호 미션을 수행한 승무원들입니다. 우주비행사 윌리엄 앤더스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달 뒤쪽은 우리 아이들이 한참 동안 놀고 난 뒤의 모래산처럼 보인다. 호되게 얻어맞았고, 명확한 경계도 없으며, 혹과 구멍 투성이일 뿐이다."

 

 

 

아폴로 8호 및 아폴로 10호부터 17호까지 승무원 모두가 달 뒷면을 목격했고 여러 달 탐사선들이 뒷면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달 뒤를 지난가는 우주선은 지구와의 직통 전파통신이 단절되었기에 통신이 재개되는 궤도에 진입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폴로 계획 내내 기체가 달 뒤로 넘어갔을 때 서비스 모듈의 주엔진이 점화되었고, 지구 관제소는 우주선이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 긴장해야 했다고 합니다.

 

지질학자이자 천문학자이고 이후 달에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인류가 된 헤리슨 슈미트는 탐사선의 착륙지점은 달의 뒷면이어야 하고, 구체적 착륙장소는 용암으로 채워진 치올콥스키 충돌구가 되어야 한다는 공격적 로비를 벌였다. 슈미트의 야심 찬 제안 중에는 당시 현역 가동 중이었던 TIROS 위성을 기초로 한 특수 통신위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위성을 파쿠하-리사주 헤일로 궤도에 띄워 탐사선이 엔진 점화 착률 및 달 표면 탐사작업을 수행하면서 지구와 교신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NASA 임원진은 위험성이 가중된다고 판단했고 자금도 부족했기 때문에 이 계획들을 기각했다고 합니다.

 

NASA 달 탐사 미션 중에는 대형 충돌 사건으로 일어난 약 2,400Km 너비의 남극 에이트켄 분지에 표본 회수용 착륙선을 보내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 대형 충돌의 힘은 달 표면에 깊이 파인 지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분지에서 회수한 표본을 분석하면 달 내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달 앞면의 부분적으로 지구에 의해 태양풍으로부터 보호받기 때문에, 달 뒷면 바다들에 있는 헬륨-3 농도는 달 표면에서 제일 높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 동위 원소는 지구 상에 상대적으로 드물게 존재하는데, 인류의 달 정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물질의 존재를 달 기지 건설의 이유로 꾸준히 언급해 왔습니다.

 

2019년 1월 3일 중화인민공화국 중국국가항천국의 창어 4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 뒷면 남극 에이트켄 분지 내에 있는 본 카르만 충돌구에 연착륙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착륙선에는 저주파 전파 분광기, 지질 연구용 도구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중국국가항천국은 창어 4호를 발사하기 7개월 전 중계위성 췌차오를 먼저 달 뒷면 상공 L2점으로 보내어, 창어 4호가 무사히 착륙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2019년 5월 16일 중국과학원 국립천문대 리춘라이 연구진은 탐사차 위투 2호의 분석 결과 달의 맨틀 성분으로 알려진 감락석 및 휘석이 분출된 형태로 나와 있었다고 네이처 지에 발표했습니다. 이는 에이트켄 분지가 소행성과 충돌하여 생겨났다는 기존 학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였습니다.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까지 입니다. 

오늘도 장문의 글 정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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